구가도시건축의 조정구 소장이 네이버캐스트- 아름다운 한국에 '서울 진풍경' 이란 코너를 연재중 입니다. 관심있게 봐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http://navercast.naver.com/geographic/seoulscape/1947


꽃과 과실이 넘쳐나는 동네 '교남동 골목을 거닐다.'


2005년 가을, 독립문 영천시장 앞에서 큰길을 건넜다. 이 건널목 자리에 그 옛날 돌다리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니 묘한 느낌이다. 영천시장을 따라 내려온 물은 다리 아래를 지나 길 동쪽으로 넘어간다. 지금은 복개되어 보이지 않지만, 무학천이 흘러 굽이친 흔적은 그대로 동네 한가운데 남아있다. 오른쪽으로 휘어지는 길, 그 옆에 붙은 1~2층짜리 나지막한 가게들 너머로 산비탈을 덮은 집과 나무들이 보였다. 여기저기 세워 놓은 차들과 간판이 어지러웠지만, 저 너머엔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아늑함 같은 것이 있으리라 느껴졌다.




작은 동네가 모인 오래된 마을

 

지금은 없는 돈의문에서 북쪽으로 뻗은 성곽 아래에는 예로부터 마을이 번성했다. 도성에 가까웠을 뿐 아니라, 중국으로 통하는 중요한 교역로인 의주로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돌다리(석교)를 건너면 바로 중국사신을 맞이하는 영은문과 모화관이 있었고, 근처에는 파발을 관리하는 역참이 있었다. 돌다리 주변에는 무악재를 넘어 농산물을 팔러 온 사람들의 난전이 펼쳐졌다. 사람들은 다리 근처 동네를 ‘돌다리골 또는 석교동’이라 불렀다. 또 의주로를 넘어온 개천이 흘러가는 근처 동네는 ‘개천깨 또는 천변동’이라 했다. 그 외에도 모화관 앞에 있다 하여 ‘관앞골 또는 관전동’이라 하였고, 파발과 관련 있다 하여 ‘파발골 또는 파발동’이라 불렸다.




지금으로 보면 작아서 어지러울 정도의 범위에 세세하게 동네를 이루고 이름을 붙여 살아온 셈이다. 1912년 지적원도와 지금을 비교하여 보면 옛 길과 골목, 필지, 그리고 하천의 윤곽과 지형이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교남동 일대의 골목을 거닐면서 느끼는 묘한 정취는 바로 이런 작은 동네의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옛 천길 옆에 있는 기이한 형상의 한옥들

 

천 길을 따라 가보니 사이사이로 골목이 나온다. 골목 안에는 한옥 대문이 빠끔히 골목길을 바라보고 있다. 길가에도 한옥들이 적지 않다. 특히 하천이 굽이쳐 정점을 이루는 곳에 있는 ‘자전거포가 있는 한옥’은 처음에는 그 크기에 놀라고, 다음엔 길을 따라 돌아가며 늘어선 가게와 대문에 놀라고, 끝에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지붕 모양에 놀라게 된다. 위에서 보면 마치 똬리를 튼 뱀 같기도 하고, 등산용 후크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이 집에는 네모난 마당과 세모난 마당 두 개가 각각 대문 하나씩을 두고 있다. 이렇게 집합을 이루는 한옥은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는데, 성북동처럼 땅 모양이 특이해서 여러 채로 나누어 짓기보다는, 지붕을 이어 하나로 짓고 대문과 마당은 세대마다 따로 두는 경우나, 왕십리처럼 여러 마당을 둔 한 채의 큰 집이 나중에 소유가 나뉘어 따로따로 쓰게 된 경우가 그 예이다.




그런데 바로 앞에 눈길을 끄는 또 한 집이 있다. 붉은 벽돌로 벽을 쌓고, 그 위에 기와지붕을 얹은 ‘2층 한옥’이 그것이다. 2층인 것도 신기한데 지붕모양은 더 특이하다. 마치 ㄷ자 한옥을 우겨넣은 것처럼, 양 날개의 처마가 붙어 있다. 왜 이렇게 집을 지었을까? 팔작지붕으로 간단하게 하나로 얹을 수는 없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땅 모양이 90도로 떨어지는 직사각형이 아니다. 먼저 땅에 맞게 벽을 올리고, 다음에 그에 맞추어 지붕을 짰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주위를 둘러보면 오래된 땅과 골목 속에 저마다 다른 모양을 한 특이한 집들이 참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의자, 평상, 소파가 같이 있는 골목

 

2층 한옥 가까이에는 특이한 골목이 하나 있다. 천 길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집 앞에 화분이 놓인 기다란 마당이 나온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가 있다.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골목 건너에 보이는 것은 기다란 소파와 평상, 사무실 의자에 플라스틱 의자 심지어 분식점에서 쓰는 조그만 나무의자까지 참으로 다양하다. 얼추 세어보니 평상과 소파 같이 큰 것이 3개 그리고 잡다한 의자들이 모두 13개다. 또한 그 배치도 한군데 집중해 모여 있지 않고, 골목을 따라 길게 배열되어 있다. 심지어 어떤 의자들은 건물 옆쪽 벽에 기대어 다른 의자들과는 완전히 돌아앉은 것도 있었다. 골목에 이렇게까지 의자가 많은 것은 흔치 않은 일이라 이웃한 주민께 물으니, 낮이면 주로 할머니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신다고 한다. 양지바르고, 골목을 드나드는 이웃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길목이기 때문에,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 아닌가 싶다. 안으로 들어간 골목은 지형에 막혀 더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다시 내려와 천 길로 합류한다.




꽃과 과실이 넘치는 골목

 

천 길 주변의 골목들은 거의 변함이 없었다. 1912년 지적원도에 나온 옛 길의 모양과 폭이 거의 그대로이고, 필지들도 몇 개씩 나뉜 것 말고는 바뀐 것이 없었다. 거기에 한옥들까지 있어 그야말로 ‘오래된 골목’의 조건을 두루 갖춘 골목이 여기저기에 많았다. 오히려 왜 이런 좋은 골목이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았는지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한 오래된 골목 중에 인상 깊은 장소가 하나 있다. 굽이쳐 돌아가는 천 길과 나란히 돌아가는 파발길 골목을 오르는 중에 왼쪽으로 꺾어 시계방향으로 돌아들어가면 갈고리 모양의 막다른 골목이 나온다. 길 끝에는 4~5채의 3,40년대 지은 한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런데 이 골목의 놀라운 점은, ‘오래된 골목’과 더불어 안으로 들어가면서 차례차례 마주치게 되는 모과, 맨드라미, 꽃사과, 감, 과꽃, 국화 등 꽃과 과실이 가득한 골목의 풍경에 있다. 과일나무와 화초를 잘 가꾸는 모습은 한옥만이 아니라, 마당이 있는 2층 단독주택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이 곳 골목에서는 한옥, 양옥에 관계없이  1, 2층의 집들이 마당과 골목에 풍성한 자연을 가꾸어 그것을 나누고 같이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래된 시간이 쌓여 있는 골목이 주는 아늑함, 다른 집에 피해를 주지 않는 적당한 집들의 크기, 그리고 주변의 환경을 가꾸어 나누려는 자세가 평화롭고 조화로운 이 골목의 풍경 속에 감추어져 있음을 알았다.


한편, 교남동 지역 북쪽에는 50년대 중반에 전후 복구사업으로 진행된 아파트, 연립주택, 단독주택의 흔적을 찾을 수 있어 흥미롭다. 한국 전쟁 후 초토화된 교남동 일부 지역에 앞으로 보급할 한국 주택의 전형을 제시한다는 목적으로 시행되었으며,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모았다고 한다. 주택지 개발의 범위는 다행히 크지 않고 기존의 오래된 동네와 잘 연결되어, 골목을 지나다 보면, 어느새 50년대의 주택지로 연결되는 느낌이다. 끝으로 때묻지 않은 서울의 오래된 골목과 주거지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영천시장 건너 교남동 일대에 꼭 가보시기를 권하고 싶다.




실측조사 및 도면
요네다 사치코, 이창규, 양수민
그래픽 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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