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찬히 도시를 보다.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을 답사하고 있다. 답사라고 하면 어떤 주제를 가지고 특정한 대상이나 지역을 둘러보는 것이지만, 우리가 해왔던 답사는 조금 특이하다. 풀어서 말하면, ‘찬찬히 이어서 보는 답사’라 하겠다. 종로와 청계천을 따라 위아래의 크고 작은 길과 골목 하나하나를 빼놓지 않고 들여다보고, 그 곳의 고유한 풍경은 어떠하고,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땅과 건물들을 관찰하거나, 살고 있는 분들과 얘기를 나누고, 때로는 건물이나 공간을 실측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을 있는 그대로 보고 기록하여 왔다.
어느덧 그 회수는 330회를 넘어섰다. 정말로 많은 것을 보았고, 모든 것이 새로웠다. 참 아름답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옥인동, 서울 구도심만큼이나 오랜 삶의 역사를 지녔던 왕십리, 끝없이 펼쳐지는 시장, 시장 그리고 또 다른 시장들, 낙산자락 계단과 골목, 고만고만한 건물이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는 이화동 등등. 여기서 더 안으로 들어가 보면, 세운상가 아래편으로 실핏줄처럼 얽힌 골목과 샛길에 붙어, 아는 사람만 찾아가는 ‘간판 없는 식당’이나, 왕십리 길 안쪽으로 네 벽만 남은 오래된 공장 터에 17가구가 모여 사는 ‘공장 속 작은 집들’, 북적거리는 광장시장 한 켠에 이 곳 시장사람들이 생활에 필요한 먹거리나 물품을 사가는 ‘시장 속 새끼시장’, 작은 골목을 아름다운 화초로 가득 채워 놓은 ‘골목의 정원사 사장님’ 등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모두가 우리 도시의 오랜 역사와 사람들의 활기찬 삶이 만나 일궈낸 것들이었고, 조금은 허름하고 어설퍼도 이러한 것들이 우리 서울의 고유하고 소중한 자산임을 깨닫게 되었다.
사라지는 서울의 모습들 하지만 한 편에서는 많은 것들이 사라져갔다. 100채 가까이 되는 사직동 한옥들과 동네가 송두리째 사라져, 겨우 몇 동의 아파트로 올라가고, 도도한 옛 모습을 간직했던 스카라 극장은 어느 날 불시에 철거되고 말았다. 청계천변 삼일 아파트는 아무의 관심도 끌지 못한 채 상가를 먼저 두고 사라졌고, 순라길의 크기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던 종묘 뒤편의 골목과 집들도 부서져, 넓고 휑한 가로공원이 들어섰다. 난데없이 등장한 뉴타운 사업은 ‘아직도 살만한 도심의 오랜 주거지들’을 가게들과 세입자가 떠나고 남아있는 사람들도 돌보지 않는 ‘삭막하고 허전한 풍경’으로 만들었다.
우리가 가진 것들의 의미와 가치를 얘기할 시간도 없이, 도시의 부분들은 너무도 쉽게 부서지고 지워졌으며, 앞으로의 계획들도 그러한 방향을 예견하고 있어 걱정스럽다. 세운상가 주변은 처음 들어간 사람에겐 당황스럽고 어지러운 공간이지만, 찬찬히 둘러보면, 예로부터 내려오는 하천과 길, 골목과 땅의 흔적들이 그대로 있으며, 아직도 2층 한옥을 포함한 많은 수의 한옥들이 남아있다. 겉으로 보는 건물들의 노후화와는 달리, 귀금속, 전자, 조명, 철재가공, 건설자재 등등, 모든 곳은 비워진 곳이 하나 없이 다양한 삶의 모습들로 생생히 채워져, 거대한 도시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 곳 세운상가 주변 블록에 행한 국제현상설계와 그 결과를 보면, 서울의 고유한 정체성 상실은 말할 것도 없이, 현대적 빌딩들이 역사와 삶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고, 오히려 당당히 종묘를 굽어보며 자리하는 본말이 교체된 기이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다.
지우지 않고 도시를 만드는 법 이러한 가운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도시를 지우지 않고 시대에 맞도록 잘 만들어가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까운 곳에서 이미 실현되고 있다. 세운상가 바로 옆 인사동과 북촌이 그 예이다. 두 지역이 21세기에 들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것은 단순한 사회문화적 현상이 아니라, ‘인사동 지구단위 계획’과 ‘북촌 마을 가꾸기 사업’이라는 계획과 내용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본 서울은 ‘커다란 역사와 자생의 터’였다. 답사를 하면서, 가끔씩 전기에 오르듯 어떤 풍경과 조우하여 멈춰 설 때가 있다. 그리고 천천히 옛 지적도와 지금의 지적도를 겹치어 본다. 앞으로 펼쳐진 굽은 길에 보이지 않던 개울이 나타나 흐르고, 눈앞에 선 나무 아래로 하얀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바삐 지나고 있다. 그리고 속으로 희망해 본다. ‘그래, 이렇게 조상들이 다니며 보던 풍경을 우리 후손들에게도 이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조정구 건축가 구가도시건축 대표 동아일보 바로가기 http://www.donga.com/fbin/output?sfrm=1&n=20070414008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