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구의 서울 진(眞)풍경 ⑤ 종로구 익선동 한옥골목
아코디언처럼 접힌 골목안엔, 3000원짜리 동태찌개가 있죠

서울 익선동 한옥골목의 풍경. 골목길이 갈라지는 곳에 구멍가게가 있다. 거대도시 한복판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모든 시간이 조금은 천천히 흐르는 듯하다. 파노라마 기능으로 여러 장을 찍어 한데 이어 붙였다. [사진=조정구]
익선동은 안에 있다. 동쪽에 종묘, 서쪽에 인사동, 위로는 창덕궁과 북촌, 아래로는 종로가 있으니, 서울에 품이 있다면 그 중 가장 깊은 품 안일 것이다. 그 안에 130여 채의 한옥이 모인 조용한 동네가 있다. 익선동 한옥골목이다.
10년 전 이곳에 답사를 왔을 때, 바깥 골목들은 이리 휘고 저리 꺾여도, ‘누동궁길’이라 불린 안쪽 길들은 남북으로 길고 반듯했다. 신기했다. 지금 이름은 ‘수표로 28길’. 수표교도 한참 먼 이곳에 참 뜬금없는 이름이란 생각이 든다.
15일 아코디언처럼 접힌 골목을 위아래로 천천히 누볐다. 그리고 골목 아래 부산집 마당에 앉아 동태찌개를 먹었다. 냉면 사발만한 그릇 가득히 살이 실한 동태 네 토막이 들어있다. 국물 맛이 진하다. 가격은 3000원. 손님은 주로 노인들이다. 여기서 40대 중반인 나는 아래도 한 참 아래다.
손님이 들어와 ‘여기 동태 둘’하고 자리에 앉으면, ‘주방대청’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예~’하고 소리를 모아 답한다. 문도 달지 않고 시원하게 열어 둔 대청, 높은 서까래 천정 아래 싱크대와 검게 그을린 가마솥 등등이 보이고, 냉장고 두 대가 마치 자리를 찾지 못한 손님처럼 기단과 마루에 올라서 있다. 마당 위에 친 눅눅한 천막이 햇볕을 받아 밝게 빛나고, 구석 위쪽의 작은 칼라TV에선 판소리가 한창이다. 묘한 곳으로 묘한 시간에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익선동은 원래 익동, 또는 궁동이라 불렸다. 조선 25대 임금 철종(1831~63)은 왕이 된 후, 자기가 태어난 곳에 커다란 궁집(궁궐 밖에 임금의 혈족이 사는 집)을 지어 돌아가신 아버지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형을 와 살게 했다. 그 집이 바로 누동궁이다. 건축 양식에도 공을 들여 대문 앞에 익랑(翼廊·날개같이 옆으로 뻗은 채)을 크게 짓고 시종들을 살게 하니, 사람들은 누동궁과 그 주변을 익랑골, 또는 익동이라 부르게 됐다.
골목에는 철물점과 세탁소, 구멍가게와 백반집, 조그만 가공공장과 사무실 그리고 전통찻집 등이 보인다. 그 가게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세를 놓는 집들 같았다. 대문에는 ‘보증금 3,000에 월세 30’ ‘큰 방 2개, 부엌 달린 독립채’ 등의 문구가 간간히 붙어 있다. 낙원상가 쪽 한옥 몇 채가 사라지고 모텔이 된 것 말고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었다. 문간채 벽에 만든 수수한 문양들도, 집과 집 사이에 둔 코끼리 머리 같은 홈통들도, 건물 한쪽 화단에 키워놓은 장미 넝쿨도 한여름 우거질 것을 기다리며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럼, 익선동 한옥골목을 만든 이는 누구일까. 정세권이라는 사람으로 건양사라는 주택경영회사를 운영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건설사라 할 수 있다. 북촌을 찾는 사람들에게 가장 유명한 가회동 31번지(남산이 내려다보이는 골목)를 만들고, 익선동은 두 번째 도전한 사업지였다. 두 곳 모두 커다란 땅을 나누고 집을 지어 살 사람을 구하는 분양방식으로, 한 편에선 ‘집장수 집’이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일제강점기 일식과 양식 주택이 밀려오는 상황 속에서, 우리 한옥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근대적 방식으로 집을 공급한 그의 공로는 매우 크다 하겠다.
경사지에 자리한 가회동 31번지는 비교적 대지가 커서 서울에 진출한 영·호남 지주들이 들어온 것과 달리, 익선동은 평지에 주로 50㎡(약 15평) 안팎의 서민용 주거를 제공한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특이한 것은 공급한 한옥 중에는 ‘ㄱ’자나 ‘ㄷ’자, ‘ㅁ’자 모양이 아닌, 지금의 아파트 평면처럼 네모난 모양의 한옥도 있다는 점이다.
한편, 한옥골목 밖에는 세월의 풍파를 겪어온 길과 골목이 켜켜이 자리잡고 있다. 동쪽에는 창덕궁으로 향하는 돈화문로와 그 옆의 피마길, 위에서 흘러온 물길과 오래된 골목들이 얽히고, 위로는 삼청각, 대원과 더불어 3대 요정이라 불리던 오진암이 있었다. 2010년 철거됐지만, 아직도 길가에는 그와 연관 깊은 한복집, 환전소, 점집 등이 남아있다. 1970, 80년대에 전성기를 누리던 기생과 요리집 이야기 또한 한 번은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몇 해 전 답사에서 찍어 두었던 어느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보았다. 오피스텔과 모텔, 그리고 높이 세운 공사장 펜스들이 익선동 한옥골목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기와지붕이 물결을 이루는 호수 위에 빌딩들이 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집들 사이사이 갈라진 골목이 보이고, 이른 봄 청명한 햇살이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지나는 사람과 오토바이가 다른 곳보다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바깥세상이 어지럽게 돌아가도 오랜 세월 이곳 사람들의 삶을 담아 온 익선동 골목은 ‘시간의 호수’처럼 조용히 서울의 안쪽을 지키고 있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