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회동 한옥의 PM을 담당했던 차종호 과장의 글과 사진입니다.
첫 인상
사람에게도 그렇듯 건물도 첫 인상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것 같다
그건 학습이나 암기를 통한 기억됨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각인된 기억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부슬비가 내리던 초여름, 빗속에서 보았던 건물은 쇠락이란 단어 외엔 떠오르지 않았다
주인할머니도 그랬고 할머니의 자식들도 그랬다
이 집을 보면서 건물도 생명을 갖고 있는 생명체처럼 주인을 닮아가는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주인이 건강하고 부지런하면 집도 건강한 윤기가 흐르고 게으르고 쇠약하면 병치레하는 사람처럼 윤기를 잃어버린다 비를 맞고있던 집은 그렇게 주인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설계
사실 설계를 하는 동안 어떻게 해야겠다는 방향을 세워두고 하진 않은것 같다
건물의 기본골격과 요구되는 프로그램이 정해져 있는 상태에서의 설계는 대증적이거나 수비적이었던 것 같다
다만, 실무적인 영역에서 밀도있는 해결을 하고 싶었다

공사
공사를 시작할때 나름대로 욕심도 있었고 자존심도 있었다. 능수능란까진 아니더라도 티격태격이 되진 않을거라 생각했지만 일하는 사람들과의 의사결정과정에서 나의 한계가 느껴졌고 깨어져야할 어떤 껍질을 인식하게 되었다
집을 짓는다는 행위는 무생물인 재료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재료를 다루는 사람과의 만남이란 경험은 소명의식이 개인주의속으로 녹아든 서구세계의 이성적 합리적 관계관으로 해결되지 않는 이 땅의 구축문화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거칠게 풀어갔지만 그렇게 부딪칠수록 점점더 유연해짐을 느낀다
그러한 점은 집이 지어지는 모습에도 반영된다

한치의 양보도 없는 긴장관계 속에서 최초의 의도를 끝까지 관철시킨다고 반드시 좋은 집이 되는 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물론 그건 사안에 따라 다르겠지만) 상대방은 내가 분명 통솔해야할 대상이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의 집을 완성해갈 동반자라는 생각이 없고선 좋은 집이 나올 순 없다

앞서 얘기했듯 집은 무감정한 재료로 짓는 게 아니다 감정을 갖고있는 사람에 의해 지어지기 때문에 그런 감정과 이해가 바탕이 되지않고는 적어도 좋은 집이 되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나 역시 현장에서 내가 모르는 방법을 찾기위해 사람들과 계속해서 얘기를 하고 질문을 하면서 지었다 기둥을 세울 때, 문꼴을 넣을 때, 창을 걸 때, 벽돌을 쌓을 때, 방수를 하고 미장을 할 때, 배수구를 팔 때, 차양을 붙이고 홈통을 세울 때, 기와를 올리고 담장을 꾸밀 때, 배관을 묻고 보일러를 걸 때, 전등을 달고 스위치를 부착할 때 등등

모든게 질문이고 모든게 신비로왔다 한 채의 집을 짓기 위해 많은 사람들의 손이 거쳐야 했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생각은 만져지는 현실이 되었다
만약 내가 그들을 압도하기 위해 혼자 실무책자를 보고 가서 지시만 했다면 현장의 끈적한 땀냄새 밴 방법들을 알아내긴 어려웠을 것이다(그렇다고 모두 옳다는 건 아니다 불합리하고 문제되는 사항도 많고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검증되는 것도 많다)

공사를 마치며...
공사가 점점 막바지로 갈 수록, 한옥에 대해, 특히 삶을 닮는 그릇으로써 한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생활의 고민이 박리되가는 한옥들이 늘어가는 요즘, 삶 자체가 타인에 의해 기획되고 디자인되는 현실을 사는 요즘, 한옥도 분명 어떻게든 변하고있다
내가 꼽는 이 집의 가장 큰 변화는 습하고 그늘졌던 첫 인상을 지워버릴 정도로 환하고 밝은 모습이 된 점이다
그리고 건축하는 사람으로써 가회동 한옥에서 발견한 것은 삶과 디자인이 만나는 경계였고 그 경계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의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