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가도시건축의 조정구 소장이 네이버캐스트- 아름다운 한국에 '서울 진풍경' 이란 코너를 연재합니다. 관심있게 봐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http://navercast.naver.com/geographic/seoulscape/1301
2009.10.17 옛 공장 안에 사는 17가구 '왕십리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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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2년, 여름에서 겨울까지 왕십리 곳곳을 답사했다. 청계천 복원도, 고가 해체도, 뉴타운 지정 이야기도 없던 때였다. “서울에 이런 동네 처음 보지요?” 하는 주민들 말씀이 참으로 실감났다. 음식으로 말하면 청국장 같다고 할까. 겉으로 보아선 결코 맛깔스럽지 않지만 실제론 구수하고 깊은 맛이 나듯, 왕십리는 공장과 집들이 섞이고 한옥과 다세대주택이 얽혀 사는 오래된 동네였다. |
상왕십리 130번지 지도 보기

왕십리 한가운데서 진풍경을 만나다
왕십리 답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미처 가보지 못한 곳을 찾아 골목 구석구석을 다시 뒤졌다. 왕십리 한가운데 사거리 큰길에서 안길로 들어섰다. 길바닥에 철판을 깔고 바깥작업을 하는 공장들을 지나, 작은 텃밭을 끼고 들어선다. 골목은 두 사람이 지날 정도로 좁다. 집들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법한 골목엔 커다란 벽 하나가 골목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두 층도 넘는 높이에 길이도 20m는 족히 넘을 큰 벽이다. 들어가는 곳은 사람 크기의 출입구 두 곳뿐, 문도 달려있지 않다. ‘도대체 이건 뭐지?’하고 긴장과 호기심으로 다가간 순간, 놀라운 광경에 ‘에~!’ 하고 탄성이 절로 나왔다. 바로 왕십리 한가운데에서 낡은 공장 안에 사는 집들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 |

왕십리, 서울을 예견하고 가장자리가 되다
새 도읍을 찾아 헤매던 무학대사 앞에 도선대사의 현신이 나타나 ‘십 리를 더 가야 한다(往十里)’고 말하는 순간, 왕십리는 서울을 예견한 자리가 된 동시에 스스로 ‘중심의 가장자리’가 되었다. 왕십리는 동교(東郊)라 불리며 도성에 무나 배추를 대는 배후지 역할을 했다. 동대문이나 광희문을 들고나는 요지에 위치해 일찍부터 발달된 시가지를 형성했으며 지나는 사람들에게 숙박이나 상업 등 편의를 제공했다. 일제 강점기인 1922년에 제작된 지도 ‘경성도’를 보면, 시가지가 밀집한 서울 동쪽으로 청계천에 붙어있는 작은 시가지가 보인다. 꼭 어미와 새끼같이 닮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왕십리다. 1920년대에는 어느 정도 상업화와 도시화가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서울 교외 지역에 유독 왕십리만이 크게 시가지를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 |

공장 안에 골목과 집들이 들어오게 된 사연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벽 안쪽은 마치 작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서쪽으로 난 두 개의 문으로 골목 두 개가 나란히 뻗어 남북으로 난 다소 작은 골목과 만나 ‘F자’의 형태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 골목을 끼고 1, 2층짜리 집들이 자리했다. 주택들 뒤로는 높은 벽이 빙 둘러 사면을 막고 서 있고, 벽체 위쪽으로 경사지게 내어 쌓은 벽돌들과 그 아래 홈들이 보여, 원래 공장의 지붕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어떻게 이런 공간 속에 여러 채의 집이 들어올 수 있었을까? 궁금해하던 중에 반가운 논문 하나를 발견했다. <상왕십리 130번지 공장건물의 변화와 주거지 적응형태 연구> (방금순, 조준범, 최찬환, 대한건축학회 논문집 v.21 n.6)가 그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처음 공장이 들어선 것은 1939년. 왕십리 지역에 급격히 공장들이 늘어나던 시절이다. 회사명은 ‘(주)흥아학동피복’으로 처음에는 학생복이나 작업복을 만들다가 일제 말기에는 군복을 생산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장(醬) 담그는 공장’으로 쓰였으며,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화재로 지붕이 소실되어 벽체만 남아 방치됐던 자리에 피난민들이 찾아들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 |

공장이라는 틀 속에 들어선 ‘자생의 건축’
논문에는 공장과 그 안의 집들에 대한 실측도면이 수록되어 있어 겉에서 볼 수 없었던 속 모양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처음 공장으로 사용될 때, 건물 내부는 여기나 저기나 다를 바 없이 동일한 공간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 여러 집들이 자리 잡을 때에는 사정이 다르다. 해가 잘 드는 곳, 다니기 편한 곳, 집 짓기 좋은 곳이 먼저 점유되었을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불리한 조건들을 어떻게 극복할까를 고민하며 집을 지었을 것이다. 여기에 가족 상황이나 세를 놓아야 하는 현실 등이 반영되면서, 결국 서로 다른 조건 속에 저마다 다른 모양의 집을 짓는 ‘자생(自生)의 건축’이 탄생한 것이다. 논문에 더하여 보다 자세한 실측작업을 벌였다. 공장 안에 집을 지으면서 생겨난 내부 골목들은 보기보다 삐뚤빼뚤했고, 집들은 위치에 따라 남북으로 혹은 동서로 길쭉한 모양을 띠고 있었다. 둘러싸인 공장의 높은 벽들 때문에 남북으로 길쭉한 집에 비해 동서로 긴 집들이 일조 등에서 훨씬 불리한 환경을 갖고 있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공장벽체를 뚫어서 방을 낸 집들이었다. 전체 평면도에서 보면, 위쪽 모퉁이로 울뚝불뚝 방들이 튀어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쉽지 않은 공사였겠지만, 불리한 환경을 이겨내고 거주공간을 마련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 |

다양한 형상의 마당들
전체 평면도에 방은 노란색, 부엌은 분홍색, 화장실은 파란색, 마루나 거실은 갈색, 마당은 밝은 녹색으로 칠해 보았다(다음 문단에 있는 평면도 참조). 또한 평면도상의 X자로 표시한 부분은 위에 다락이 있는 곳을 뜻한다. 실측을 마치고 보니 몇 곳을 제외한 대부분의 집에 마당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 중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하늘로 열린 형태의 마당은 하나도 없었다. 저마다 다른 모양과 구조를 하고 있었다. 지붕을 덮고 창을 내어 건물 안으로 마당을 들인 ‘실내 마당’, 천장을 뚫어 아트리움처럼 빛을 들인 ‘빛 마당’, 그리고 마당 위를 덮었지만 높게 지붕을 두어 마당 위쪽으로 바람이 들고나는 ‘높은 마당’ 등이 그것이다. | |

다양한 마당의 꼴만큼이나 흥미로운 것은 마당을 중심으로 각 방들의 배치가 도시한옥의 방, 마루, 부엌이 일반적으로 놓이는 형태와 흡사하다는 점이다. 북서쪽 구석에 붙은 집을 보면 그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다. 평면을 보면 마당을 둘러싸고 건너방-마루-안방-부엌(다락)-방 그리고 바깥에서 통하는 화장실이 자리한다. 그 중 마루는 벽 안쪽의 폭이 1.2미터도 되지 않고 부엌 또한 마찬가지로 좁다. 신기한 것은 그 위에 안방에서 통하는 다락까지 있다는 사실. 작고 비좁은 집이지만 한옥에 있어야 할 마루, 안방, 부엌, 다락 등 갖출 것은 다 갖춘 셈이다. | |

‘주거의 원형’에 대한 의식
폐허가 된 공장에 사람들이 들어와 아무렇게 집을 짓고 살았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당시에 그들이 생각하는 집을 머릿속에 그리며 착실히 그들 삶의 공간을 지어나갔다. 옛 공장 속에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았다는 사실만큼이나 집에 대한 의식, ‘주거의 원형’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뿌리 깊은가를 왕십리 옛 공장의 집들은 잘 말해주고 있다. 왕십리에는 이야기할 것들이 너무 많다. 조선시대 옛 시가지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한옥과 골목길, 꽃재, 긴마루재, 단우물, 말우물 등 옛 지명과 풍경이 일치하는 장소들, 흥미로운 모양의 한옥과 다세대 주택, 커다란 은행나무 공원 등. 하지만 현재 철거 중인 왕십리에서 이 모든 이야기는 너무도 아쉽지만 때늦은 비망록이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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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측조사 및 도면 요네다 사치코, 조지영, 최지희, 지경종, 소정은, 강수연, 황주현 그래픽 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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