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 '기간의 도시'는 사무실 open부터 꾸준히 진행해 온 수요답사를 바탕으로 정리한 도시이론입니다. 가시적으로 확고한 역사적 맥락이 없으면서도, 서구의 도시와도 그 양상을 달리하는 살아있는 우리 도시 또는 범아시아권 도시를 설명할 수 있는 작은 단초가 되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국건축역사학회 2004년 추계학술발표대회에서 발표한 것을, 한국 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연구소에서 발간하는 'Visual 2006 vol.3'에 수정, 보완하여 게재하였습니다.
機間의 都市
조 정 구 guga 도시건축 연구소
종로와 청계천을 축으로 몇 해에 걸쳐 ‘도시답사’를 하는 동안, 도시라는 건조환경에 서식하며 그 환경에 적응하고 때로는 그것을 변형하며 환경을 재구축하는, 주체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사람이나, 기능이라 말하는 프로그램이 아닌, 생멸하는 존재 말하자면, ‘도시의 건조환경 속에 기능을 수행하는 하나의 운영단위이며, 기능에 따른 자체의 시스템을 지닌 존재’라 정의할 수 있으며, 그것을 ‘기간-機間’이라 명명하였다. 본 글에서는 기간을 정의하게 된 배경과 그 정의와 속성을 설명하고, 환경 속에 자리하는 기간의 다양한 존재방식을 사례로 보여주려 하였다.
뒤에는 기간과 건조환경의 관계에 초점을 두어, 기간과 보편적인 건축물과의 관계, 기간의 점유로 지속되는 건축의 생명력, 그리고 끝으로 ‘경계없는 세계’에서는 건축의 유형이나 소유의 경계를 넘어, 도시 속에 고유한 환경을 만들어내는 매개로서의 기간과 그것이 구축한 건조환경의 가치를 조명하고자 했다.
도시를 답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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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1 ‘이어서보기’를 도해한 것 - 종로답사의 일부 |
도시를 직접 보아야겠다는 단순한 의지에서 시작한 주 1회의 답사는 이번 발표가 있기까지 220회 정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답사의 방법은 ‘이어서 보기’, ‘기록하기’, ‘들어가 보기’와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인터뷰’, 일부 건조환경의 ‘실측’순으로 점차 체계를 잡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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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2 ‘기록하기’의 한 사례, 시작과 끝지점, 경로를 표시하고, 언급할 만한 부분을 표시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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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3 철거 전 사직동의 모습 |
종로와 청계천을 큰 축으로 4년에 걸쳐 서울의 구도심부를 답사하는 동안, 단성사와 피카디리 극장이 철거되고, 청계천 고가가 없어졌으며, 옆에 있던 삼일아파트는 아래 상가만을 남긴채 철거되었다. 청계천은 급급하게 복원공사를 하고, 종로1가에는 피맛길을 막고 들어설 20층 규모의 주거용 오피스텔 건설로 공사가 한창이다. 아름다웠던 사직동 한옥들은 계단만을 남긴채 폐허 속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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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4 계단만을 남기고 철거된 사직동의 모습 |
답사로 알게 된 도심의 특징은 아래와 같은 것들이었다.
얇은 물리적 표층 속에 깔려 있는 자생적 형상의 필지들
우리가 본 건축물을 포함한 도시의 물리적 표층은 대부분 100년이 채 되지 않은 것이었다. 얇은 표층을 들춰내면 거기에는, 수 백년을 지속해 온, 길과 필지의 모양이 드러났다. 땅에 순응하며, 하나둘씩 만들어진 ‘자생적인 형상의 필지들’이 바로 그것이다. 한편, 물리적 표층의 역사가 짧다는 것은, 그만큼 도시 전체영역에서, 급속하게 ‘도시의 변모’가 이루어졌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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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5 용두동, 여러 유형의 건축이 겹쳐 보이는 도시의 풍경 |
도판6 종로 2가 어느 숯불갈비집, 여러차례의 개조와 증축을 한 건물의 모습 |
혼재된 도시풍경과 건축물의 변형
우리 도시의 모습은 다양한 건축유형이, 한 시야에 들어오는 ‘혼재된 도시풍경’이라 말 할 수 있다. 집단화된 건축유형을 유지하려는 도시계획이나 경관지침이 없었으며, 개개의 필지는 자신이 처한 도시적 상황이나 내적 필요성에 맞게, 당시에 선택 가능한 건축물을 지어, 기존의 건축물과 대체하였다.
또 지어진 건축물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되었다. 입면이 덧대지거나, 증축되고, 외부계단이 설치되고, 옆건물과 브릿지로 연결되거나, 간판이 붙는 등, 건축물의 변형은 ‘혼재된 도시풍경’을 완성(?)하는 역할을 하였다.
끝없는 가게, 넘쳐나는 삶의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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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7 황학동 중앙시장의 내부풍경 |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끝없이 나타나는 가게들이었다. 서대문에서 세종로를 가로질러, 종로를 달려 다시 도성밖 왕산로로 뻗어, 청량리역을 지나고, 더 나가 도시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이 가게의 물결은 멈추지 않는다. 대로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안쪽 후미진 골목까지도, 구도심의 모든 영역은 생동하고 있다. 재래 시장들, 작은 가게들, 공장들, 건축물의 안 혹은 그 틈, 그리고 그 밖에서... 우리는 도시공간과 건축 속에 넘쳐나는 삶의 모습들을 보았으며, 너무나 일상적인 이것들이 우리 도시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임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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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8 낙원동의 임대 건물 모습, 소유주 7명에 가게는 모두 18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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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9 종로2가 관철동일대 네온사인과 간판들 |
산호, 산호초 그리고 거대한 자생의 군락
여전히 남아있는 자생적인 필지, 각기 다르게 생성과 변형, 소멸의 과정을 겪고 있는 건물들, 그리고 그 속에서 전개되는 다양한 도시의 삶을 보는 것은, 마치 암반에 고착하여 생장하는 산호와 산호초 그리고 그 속에 서식하는 바다의 생태계를 보는 것 같았다. 우리 도시는 끊임없이 생동하는 살아있는 전체이자, 거대한 자생의 군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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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10 광장시장 중앙 로툰다와 시장의 모습 |
도시 생명체 - 機間과 그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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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11 중구 예관동 한 서점 내부모습, 처음에는 서점에서 출발, 문방구, 분식점으로 기능을 추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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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12 위 서점의 외부 모습, 일부면이 분식점 가판으로 쓰이고 있다. |
산호의 각질 속에 폴립이 들어있듯, 건축공간 속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삶들이 담겨져 있다. 삶이라 말하지만 그것은 매우 다양한 것들이다. 문방구, 약국, 극장, 병원, 구두점, 토스트, 복덕방, 학교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그것들은 특정한 도시적 기능이나 역할을 수행하는 것들이다.
이들 ‘기능들’은, 그것을 수행하는 인적조직과 장비 등의 시스템을 갖추고, 이것들이 모여 가동할 수 있는 거점공간을 갖는다. 또한 자연 생태계에서 각 생명체가 환경에 서식하며, 여러 작용을 통해, 생명을 유지하듯이, 이들 ‘기능들’은 도시라는 환경 속에서 기능을 수행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운영단위’라 말 할 수 있다. 은유적으로 말하면, 도시라는 생태계에 서식하는 도시생명체가 바로 이 ‘기능 혹은 운영단위’라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들 도시생명체를 기능적인 존재라는 뜻의 ‘기간-機間’으로 명명하였다. 정리한 기간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도시환경 속에 기능을 수행하는 하나의 운영단위이며, 기능에 따른 자체의 시스템을 지닌다.’
기간의 보편적 속성 각 기간의 개별적인 특성에 관계없이, 기간은 다음과 같은 보편적 속성을 지닌다.
첫째는 ‘개별적 생존의지’이다.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매우 경제적이고 합리적으로 환경을 구축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기능을 추가하여 생존을 모색한다.
둘째는 ‘집단화의 경향’이다. 앞의 것과 연결되는 것으로, 집단을 형성하는 것이 개개의 생존과 지속에 유리하기 때문에, 기간은 ‘기간의 집합체’를 형성하고, 집단화하려는 성향이 있다. 또 다른 기간과의 연계로 독특한 건축적 구성을 하거나, 기간체와 기간체 상호간의 상관관계가 증폭되어 영역이 확대되기도 한다. 금은세공 밀집지역이나, 종로에 면한 재래시장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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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13 여러개의 서로 다른 영역이 거대한 집합을 이루는 광장시장의 배치도 |
셋째는 ‘순응과 발현’이다. 개별적인 생존의지가 바탕이 되어, 주어진 건조환경에 자신을 맞추려는 순응의 속성과, 주변에 대하여 자신을 드러내거나, 적극적으로 환경에 변형을 가하는 발현의 속성을 지닌다. 기간이 ‘건조환경의 변형의 주체’인 것은 위와같은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기간에게 주어진 임의적 환경은 자신에 맞추어져 제공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간은 순응 혹은 발현의 과정을 거쳐, 자신의 환경을 구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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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14 ‘순응’의 한 예, 종로2가 장안빌딩의 한 카페 |
도판15 카페의 내부모습, 원래 건물전체에서 쓰던 정면현관 계단이 카페내부로 흡수되어 쓰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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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16 ‘발현’의 한 예, 인사동의 어느 건물 2층에 자리한 전통찻집 큰 길에서 본 모습 |
도판17 안쪽 후미진 곳에 위치하여, 사람을 유도하기 위해, 건물 아래에 길에서 입구까지 전통적 건축장식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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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18 옥상에서 본 광장시장의 브릿지 연결부분, 하나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양쪽에서 뻗어나와 만난 듯한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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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19 종로2가 YMCA 근처, 하나의 건축물을 하나의 機間-간판가게가 점유하고 있다. |
도판20 계동의 커다란 한옥 문간채의 모습, 여러 기간들이 한 ‘칸-방’씩 점유하고 있다. |
이 3가지 보편적 속성은, 다양한 물리적 표층 아래있는, 도시영역의 생성과 쇄망 그리고 그 안에 이루어진 복잡한 집합적 양상의 동인이 된다. 청계천 수산물 시장의 오랜시간에 걸친 이동이나, 숭인동 구신설종합시장의 몰락과 다시 들어온 원단시장의 쇄진, 거대한 광장시장의 입체적인 통합등은 그 가까운 사례라 할 수 있다.
기간의 존재방식 기간이 도시에서 존재하는 방식은 기간의 특성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보다 많은 방식이 있을 것이나, 여기서는 기본적인 몇가지로 정리하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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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21 종로2가 피맛골 위쪽에 군집한 5개의 기간들-한식당과 일식집들-이 주변의 건축물들을 잠식하고 있다. 어느 한식집은 5개의 건축물에 3개의 출입구를 두고 있다. |
점유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다. 건축을 포함한 건조환경의 전체 혹은 일부를 점유하는 것이다. 특정한 건축유형과 부분을 점유한 기간이 합쳐져서, 기간의 이름이 된 특별한 사례가 있어 흥미롭다. ‘책방’과 ‘옷방’이 그 예이다. 길에 면한 한옥공간이 변형되어, 방 한칸 한칸이 책을 파는 ‘책방’이나 옷을 파는 ‘옷방’이 된 것이다. 점유한 환경에 순응한 예이다. 한편, 점유한 공간을 적극적으로 분화하여 자신의 시스템을 적용한 ‘노래방’의 발현적 예와는 대조적이다.
잠식 기간이 건축적 경계를 벗어나, 외부의 도시공간, 혹은 다른 건조환경을 잠식하는 것이다. 종교시설과 같은 커다란 기간의 경우, 주변 잠식의 사례는 현저하다. 원래 여러 건축유형이 혼재하던 주거지에 진출한 식당군들의 잠식의 상태도 매우 흥미로운 사례이다. 여러 건축유형을 잠식하는 기간에게, 건축적 경계나 건축 구법 혹은 양식의 통일이라는 건축적 고려사항들은 무의미하다. 인사동의 통인가게 1층 매장처럼 오히려 우연적 잠식의 결과가 좋은 결과를 만드는 사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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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22 종로1,2가에 가면 어디서나 눈에 띄는 여행사의 간판 |
도판23 종로2가 주변 위의 여행사가 들어있는 건물을 색으로 표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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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25 종로2가 관철동,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부동산 |
점재 종로일대의 ‘탑항공’이 그 사례이다. 종로의 이곳저곳에 붙은 탑항공 간판은, 널려있는 선전용 간판이 아니라, 실제로 여러 건물에 탑항공 영업소가 있다는 표시이다. 모두 23부가 있으며, 적은 규모로 종로의 여러 곳에 점재되어 있는 것이 운영에 유리한 경우라 보여진다. 또 다른 예로는, 종로3가 학원가 근처의 ‘경북’시리즈이다. 한 명의 사장이 운영하는 이 기간(들)은, 4거리를 중심으로, 경북에서 시작하여 경북 5호점까지, 식당, 호프집, 일반주점, 민속주점 등 서로 다른 기능으로 입체적으로 점재하고 있다. 기간의 존재방식 중, 점재는 발견하기 어려운 드문 경우라 여기기 쉽지만, 대표적인 것으로 은행의 각 지점과 무인인출기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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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24 숭인동 원단종합시장 안에서 본 커피아줌마의 이동식 장비 |
도판26 종로1가 피맛골 안쪽에 자리한 포장마차 두는 곳 |
유동 건축물에 들어가지 않고, 자체의 장비를 구비하여 움직이는 방식이다. 또는 일정 시간에는 없다가 나타나는 노점과 같은 것도 그 예가 될 수 있다. 시장의 커피아주머니는 대표적인 예이다. 흥미로운 것은 과거의 부동산이다. 부동산이란 기간은 건축물에 들어서지 않고, 동네 어느 건물 한켠 혹은 가게 앞에 의자 몇 개와 천으로된 장막하나로 가게를 열고 닫았다. 점차 건축공간을 점유하기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그 애매한 상태는 지속되어, 다른 가게의 안구석 한켠을 차지하거나, 건물 실내계단 아래에 자리잡는 등, 버젓이 자리잡는 공인중개사와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건물 사이에 들어선 부동산과 그 외의 기간들, 예를 들면 꽃집, 분식점, 필방 등은 유동하는 기간-노점이 점유하는 기간으로 바뀌는 중간단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한 편, 유동하는 기간의 장비-포장마차를 두는 숨겨진 장소를 간간히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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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27 중학동 중국집, 골목 안쪽에 자리했지만, 앞 건물 일부 공간을 입구와 복도로 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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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28 다른 건물로 난 큰 길쪽 입구모습 |
공생 하나의 공간이나 시설을 여러 기간이 같이 쓰거나, 다른 건축물에 속해 있으면서, 한쪽의 공간을 빌리거나, 공용으로 시설을 같이 쓰는 경우이다. 하나의 공간에 여러 가게가 들어가는 보석백화점은 그 대표적인 경우이며, 인사동에서, 인접건물의 계단을 쓰는 2층의 기간들이나, 중학동에 있는 골목안 중국집의 경우는 흥미로운 예이다. 칸막이 벽이 없이 한 공간을 나누어 쓰는 을지로 3가의 타일과 도기가게도 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을지로 4가의 ‘장사기계공구상가’였다. 어림잡아 30개가 넘는 기간이 여러 건축물에 들어있는 이 곳은 사람들이 다니는 도로에 지붕을 덥고, 화장실과 물쓰는 곳을 공유하고 있다. 공생이 중요한 것은 이것이 ‘합의’의 산물이며, 건축물이나 소유의 경계에 한정되지 않는, 기간들의 자생력이 만드는 독특한 형상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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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29 장사기계 공구상가 안 골목의 모습, 건물 사이는 목재 트러스와 비닐 슬레이트로 덮혀 실내화 되었다. 화장실과 물쓰는 곳을 30여개의 기간-공구상이나 가공공장이 같이 쓰고 있다. |
보편적 건축과 기간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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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30 종로 3가 북쪽에 면한 건물들의 동선을 개략적으로 나타낸 그림. 전면 폭의 제한성과 접근로로서 피맛골의 비중등이, 각 건물의 계단과 동선형식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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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31 종로1가의 한 건물, 한 때는 유명한 장의사가 점유하였으나, 이후 빵집으로 변모하였다. |
기간이 일방적으로 건축이나 건조환경에 순응하거나 발현의 과정을 거치며 들어서는 것으로 생각되기 쉬우나, 기간은 보이지 않게 건조환경의 구축에 영향을 미친다. 이미 우리가 설계를 하는 과정에서, 정면이나 주진입의 방향을 설정하고, 계단의 위치나 동선을 정하는 행위에는, 가상적으로 몇몇의 범주로 구분되는 기간의 점유를 염두에 둔 것이다. 종로 3가 북쪽 피맛길과 큰 길 사이의 건물들은, 마치 자회된 암석을 보는 것처럼, 당시의 그런 해석이 그대로 건축의 동선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전면 폭의 제한성과 접근로로서 피맛골의 비중등이, 각 건물의 계단과 동선형식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또 6-70년대에 지어진 건물들에서 보이는 ‘질주하는 계단’은 지상층이 도로에 접하는 폭을 최대한 확보하면서, 상부의 기간들이 거리와 직접 연결되도록 하는 당시의 의도를 담고 있다.
기간의 점유와 건축적 생명의 지속 마치 산호초를 만들었던 원래의 산호가 사라졌어도, 그 곳이 다른 바다 생물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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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32 황학동 중앙시장 근처에 있는 구성동극장, 지금은 가구점, 가게, 여행사, 고시원 등 여러 기간이 점유하여 그 건축적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
도판33 가구점으로 쓰고 있는 내부모습, 원래 극장의 내부공간을 바닥만 막아 쓰고 있다. |
자리가 되듯이, 과거의 많은 건축물들이 생성당시의 기간들과는 다른 기간들에게 점유되어, 다른 모습이지만, 건조환경으로 건축적 생명을 지속하고 있다. 종로 1가에 있던 장의사 건물이 빵집이 되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서있거나, 지난 시절의 대형 극장이 가구점과 다른 기간으로 점유된 모습은 흥미롭다.
이상적인 사례로는 체부동의 한식당을 꼽을 수 있다. 한옥 4-5채를 잠식하여 들어서면서, 한옥과 마당을 잘 유지하고 활용하여, 한옥의 건축적 생명과 기간의 활성화를 같이 실현한 도시재생의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경계없는 세계 - 을지면옥 을지로 3가의 을지면옥은 위에서 설명한 기간의 다양한 존재방식과 속성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길에서 한 켜 들어간 안쪽골목에 있지만, 큰 길에 면한 다른 건물의 공간을 접근로로 이용하고 있다. 길다란 복도한쪽에는 긴의자들이 놓여있고, 벽에는 북녘땅의 사진과 지도, 풍경화로 가득하다. 복도를 빠져나와 다시 안쪽골목을 가로질러 들어서면, 1층 식당과 왼쪽에 2층으로 가는 계단이 있다. 이 계단을 오르면 훤한 광정 마당이 나오고, 2층 자리에는 장년층 어르신들로 북적댄다. 큰 길에선 알 수 없던 감격적인 시이퀀스와 풍경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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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34 을지로 3가 어느 냉면집, 큰 길에서 다른 건물 복도를 지나 골목을 건너 들어가면, 여러 건물을 점유하며 기간이 자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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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35 평양식 냉면을 파는 곳이라, 큰 길에서 들어가는 복도에는 의자와 함께, 북녘의 지도와 사진이 가득하다. |
광장이 있는 건물과 들어온 입구 건물은 다른 건물이다. 불리한 입지조건을 남의 공간을 빌려 진입로를 확보하고, 서로 다른 건물을 결합하여 쓰고 있는 을지면옥은 지적상의 필지나 도로경계도, 건축유형의 구분도 없는 ‘경계없는 세계’이다. 또한 잃어버린 고향의 기억을 되새기는 교류의 장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에서, 건축만으로 구현할 수 없는 이러한 고유한 환경이 기간을 매개로 구축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맺으면서 기간의 개념정의와 분석을 통해, 우리 도시를 읽어보려 하였다. 보편적인 속성이나 존재방식 등을 개괄적으로 기술하였으나, 이론으로 구축되기에는 아직 갖추어야 할 점이 많다. 보다 많은 조사와 깊이 있는 고찰이 필요하다.
다만, 도시를 하나의 생태계로 보고, 그 주체로서 機間을 바라보는 시각은, 우리 도시가 지닌 정체성과 가치를 논할 때 중요한 개념의 틀이 될 수 있으리라 여긴다. 도시환경의 가치를 건조물의 중요성이나 경제적 논리에만 근거하지 않고, 자생적으로 전개된 우리 삶과 그것이 구축한 고유한 환경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더불어, 지금 계획되고 지어지고 있는 도시와 건축이, 기간의 보편적인 속성에 맞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던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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