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한옥의 보전 대책을 세워야.


'한옥'은 무엇일까? ‘한옥(韓屋)’의 정의를 사전에서 살펴보면 우리나라 고유의 형식으로 지은 집을 양식 건물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한다. 한옥 하면 우리가 떠올리는 것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 한옥 / 서울 종로구 운니동의 운현궁(대원군의 사저, 서울특별시 사적 제257호)
ⓒ 김영조
시골에 도시의 아이들을 데리고 가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은 뒷간이다. 집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 떨어져 있어서 밤에는 귀신이 나올까 봐 무서워하며, 방한이 되지 않아 춥기 때문이다. 문 틈새로 들어오던 겨울철의 황소바람, 가스 때문에 입을 막고 갈았던 연탄 등 어쩌면 한옥에 대한 기억은 가난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옥은 돌아가고 싶은 추억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최근엔 다시 한옥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저 과거의 집이 아니라 참살이(웰빙) 시대를 맞아 진화한 모습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서울 북촌마을엔 한옥 치과가 생겼으며, 한옥에 일식집을 차린 곳이 있고, 한옥을 개조하여 원룸 사무실로 쓰고 있는 곳도 있단다. 그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한옥 칭찬을 한다. 사람이 살기에 이렇게 좋은 집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사람을 위한 집, 한옥

그러면 우리 겨레가 오랫동안 살아왔던 이 한옥이 정말 사람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 집인가? 과학칼럼니스트 김형자 씨는 생태적으로 볼 때 사람이 살기에 가장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는 집은 한옥이라고 말한다.

한옥은 중국, 일본의 전통 가옥이나 양옥과 달리 비교적 높은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지어져 있다. 이것은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습기를 막아 습도가 높은 장마철에 눅눅함을 막아준다.

▲ 경북 안동의 한 한옥
ⓒ 김영조
또 한옥은 깊은 처마가 해를 가리는 구실을 해 마루나 방에 직사광선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준다. 이 때문에 여름에는 그늘진 집 안과 햇빛으로 달궈진 마당의 온도차로 인한 공기의 대류현상이 일어나 시원한 바람을 얻게 된다. 이와 반대로 겨울에는 집안 깊숙이 햇볕이 들어와 집안이 따뜻해진다.

또 황토로 지은 집은 단열이 잘돼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게다가 스스로 습기와 열을 조절하기 때문에 눈, 비가 올 때는 수분을 흡수하고 반대로 건조할 때는 습기를 내뿜어 집안의 습도를 조절하며, 해에서 받는 에너지를 보관하고 내뿜는 온도 조절기능도 지니고 있다.

이밖에 한옥은 현대의 집에 비해 지진에도 강하다고 하며, 불이 났을 때에도 천연자재를 사용한 까닭에 유독가스를 내뿜지 않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한옥의 가장 뛰어난 특징은 온돌에 있다. 온돌은 학자들이 현대까지 통틀어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난방방법이라고 말한다. 불을 깔고 앉아 난방과 밥짓기를 동시에 하는 것으로 그 열효율도 대단한 과학이 바로 온돌이다. 아궁이와 아궁이후렁이, 부넹기, 구들개자리, 고래, 고래개자리, 굴둑, 구새의 차례로 만들어진 온돌은 오랜 옛날 우리 겨레가 생각해낸 과학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뛰어난 한옥도 이젠 그 맥이 끈길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서울 북촌마을이나 전주 한옥마을처럼 보존하려는 노력이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제 좌식이 아닌 입식 생활방식에 익숙해져 한옥을 잊어가고 있는 것이다.

숙종 때 영의정 생가, 경기도 광주에 방치

▲ 여성제 생가의 문살(한쪽이 뾰족하게 된 독특한 모양새이다)
ⓒ 김영조

▲ 여성제 생가의 아름다운 서까래
ⓒ 김영조
광주시 남종면 수청리 254-2에는 작지만 품격있는 한옥이 한 채 있다. 이 한옥은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여성제의 생가이다.

여성제는 누구인가? 여성제(呂聖齊)는 조선 숙종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함양, 호는 운포이다. 1654년(효종5)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정 9품 검열이 되었고, 이후 동부승지, 대사간, 예조판서, 병조판서, 우의정, 영의정을 두루 거쳤다. 여성제는 강직한 사람으로 두 번의 유배도 당했으며, 인형왕후 폐출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다가 고향에 내려가 울분으로 살던 끝에 숙종 17년(1691)에 세상을 떴다.

저서로는 <운포집(雲浦集)> 3건이 있으며, 시호는 정혜(靖惠)이고, 묘는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수청리에 있다.

여성제의 생가가 있는 수청리 마을은 원래 함양 여씨들이 모여 살던 집성촌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해방 이후 민족지도자 여운형이 좌익으로 몰리면서 이 마을에 살던 여씨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이 한옥의 소유주인 여성제 선생의 후손도 외국으로 건너갔으며, 아무도 관리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다. 들어가는 길이 좁고, 정비가 되어 있지 않아 접근성이 떨어진다.

▲ 여성제 생가 앞쪽(여러가지 쓰레기로 뒤덮힌 모습)
ⓒ 김영조

▲ 여성제 생가 전경(지붕은 비가 새는지 천막을 덮었고, 폐가 직전이다)
ⓒ 김영조
여성제의 생가는 현재 건평 49.82제곱미터의 사랑채만 남아있는 모습이지만 허름한 모습 안에 그 품격은 아직도 당당하다. 바짝 다가서서 본 방문과 문살 그 위에 보이는 서까래 등은 여전히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특히 문살은 바깥쪽이 뾰족하게 된 그 어디서도 보지 못하던 것이다. 그리고 영의정까지 지냈던 사람의 생가라고 여겨지지 않을 만큼 소박하다.

아직 한옥의 아름다움과 품격이 살아있는 여성제의 생가엔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현재 지붕은 비가 새는지 온통 천막으로 덮어놓았으며, 여기저기 쓰레기들로 뒤덮여 있다.

이 생가를 지금 광주시문화원(원장 이상복)이 방치할 수 없다며, 대책을 마련 중이지만 아직 확실한 방안을 마련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생가터는 녹지대로 묶여있어 개발을 할 수가 없고, 다른 곳으로 옮겨 복원할 방법을 고려 중이지만 아직 마땅치 않다는 얘기다.

하나 둘 사라지는 이런 한옥을 방치한다면 머지않아 한옥의 아름다움을 우리는 주변에서 찾지 못할지 모른다. 이런 명사의 생가가 이대로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 지방자치단체나 문화관광부는 우리 겨레가 쌓아 온 문화의 흔적이 지워져 가는 것을 보고만 있지 말고, 적극적으로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그대로 놔뒀다간 주저앉을지도 모른다. 하루빨리 여성제 생가의 보존대책을 세워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2007-01-22 오마이뉴스 김영조 기자
분류 :
건축
옵션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