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문화재자료 제 45호 거룩한 말씀의 수녀회 성당

▲ 대전 문화재자료 제45호 거룩한말씀의수녀회 성당.
ⓒ 안병기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래한 지 200여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났다. 천주교는 1784년(정조 8), 중국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이 이벽, 정약전 등과 함께 신앙공동체를 구성함으로써 이 땅에 뿌리박기 시작했다.

그러나 초기 신도들은 박해를 피하려다 보니 마음 놓고 자신들의 신앙의 터전인 성당조차 가질 수가 없었다. 천주교가 전래한 지 무려 114년이 지난 1898년에야 비로소 우리나라 최초의 성당이 등장했다. 고딕식 건물인 '종현 성당(현 명동성당)'이 그것이다.

대전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성당은 어디일까. 1921년에 지은 '거룩한말씀의수녀회' 성당이다.

대전에 삶의 터전을 잡은 지 십여년이 흘렀지만 아직 그곳에 가보지 못했다, '언제 한번 찾아가 봐야지'라고 생각은 늘 하면서도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했던 것이다. 지난 14일(토요일), 내 딴엔 큰맘 먹고 중구 목동에 거룩한말씀의수녀회 성당을 찾아 나섰다.

충남여중 건너편 골목 어귀에 새워진 이정표를 따라 오른쪽 골목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목동 성당이 나온다. 바로 그 옆, 육중한 돌로 된 정문을 지나 언덕을 올라가자 거룩한말씀의수녀회 성당이 있다. 을지대학병원이 빤히 바라다보이는 곳이다. 육신의 병을 고치는 병원과 마음의 병을 고치는 교회가 가까운 거리에 함께 있다는 것은 꽤나 상징적이다.

▲ 성당의 우측면.
ⓒ 안병기
▲ 함석으로 이은 성당 지붕이 몹시 아름답다.
ⓒ 안병기
▲ 성당의 좌측면. 새로 지은 건물 때문에 약간 옹색해 보인다.
ⓒ 안병기
처음 올려다본 중세 고딕풍의 하얀 백색 건물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사람으로 치면 첫눈에 반했다고나 할까. 거기 잠시 들어갔다가 나오기만 해도 그냥 더러운 영혼이 씻어질 것만 같았다. 가톨릭 신자인 최종태의 조각들에서 받는 느낌과 비슷한 유의 감흥이 일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건물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야 찾아오다니. 내 게으른 다리를 몇 번이고 쥐어박고 싶을 정도다.

건물의 바깥부터 천천히 돌아보기로 한다. 단순하고 간결하게 지어진 중세 고딕양식의 건물이다. 정면 중앙부 정면 가운데 출입문 위로 종탑이 우뚝 서 있고 정면 한 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된 아담한 건물이다.

처음에는 대전성당 건물로 쓰였으나 천주교 대전 본당이 대흥동 네거리로 옮겨가면서 1969년부터 현재까지 프란치스코회 소속 '거룩한 말씀의 회' 성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다.

▲ 성당 우측 통로에 아름답게 피어난 부처꽃.
ⓒ 안병기
성당 우측으로 돌며 건물을 둘러본다. 부처꽃이 무더기로 피어있다. 부처꽃은 부처꽃 과에 속하는 꽃이며 두렁꽃이라고도 부른다. 하나의 꽃대 줄기에 다닥다닥 붙은 보라색 꽃이 아름답다. 아련한 꽃 색깔 탓인지 꽃말조차 '비련, 슬픈 사랑'이다.

일본에서는 지옥에 떨어진 조상의 영혼을 구하려고 불공을 올리는 우란분절(음력 7월 15일)에 이 꽃을 불단에 바친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꽃이란 이름이 붙은 것인지 모르겠다. 모르고 심은 건지 어쩐 건지 모르지만 성당 뜰에 부처꽃이 심어져 있는 풍경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 성당 내부 천장.
ⓒ 안병기
▲ 성당 내부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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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 내부 벽에 걸린 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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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안으로 들어가 보려고 허락을 얻으러 성당 사무실로 가니 늙은 수녀님이 홀로 앉아 계신다. 용건을 말하자 정면 3개의 문 가운데 왼쪽 문이 열려 있으니 그리 들어가면 된다고 말씀하신다.

성당의 내부 평면은 직사각형이다. 나무 기둥들이 좌우로 늘어서서 내부를 기도공간과 왕래할 수 있는 복도로 자연스럽게 나누고 있다. 제단부에는 세 개의 아치가 있다. 다른 공간과 구별되는 위계성과 신성성을 부여하려는 의도인 모양이다.

처음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왔을 적엔 '남녀유별'이라는 유교의 가르침 때문에 남녀가 함께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생겨난 게 이른바 'ㄱ자 형' 예배당이다.

ㄱ자의 꺾어진 모서리 부분에 강단을 설치하고 강단 좌우 날개 부분에 앉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쳐다볼 수 없도록 휘장을 쳤다. 좌석 배치만이 아니라 남녀가 드나드는 문도 달랐다 한다. 남녀가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예배당이 생겨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1910년대 이후에 비로소 서양식 '1자 형'으로 바뀌면서 'ㄱ자형' 예배당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는데 지금 남아 있는 곳은 김제 금산 교회와 익산 두동 교회 두 곳뿐이라고 한다. 아마도 거룩한말씀의수녀회 성당 내부는 'ㄱ자 형' 예배당에서 '1자 형' 예배당으로 건너가는 길목에서 탄생한 건축이 아닌가 추측된다.

벽면에 걸린 '십자가의 길' 부조를 따라가 본다. 예수의 고난을 형상화한 이 부조와 첨탑의 십자가는 독일에서 수입한 것이라고 한다. 행여나 옛날 오르간이라도 남아 있을까 둘러보지만 헛일이다.

모르긴 해도 이렇게 소박하고 아름다운 성당에서 올리는 기도는 천주에게 무조건 1순위의 고려대상이 될 것 같다.

흔적없이 사라져가는 근대건축물들

성당의 건평은 245㎡이다. 평으로 환산하면 70평이 조금 넘는 건물이지만 바라보는 사람을 주눅이 들게 하지 않으며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을 포근히 감싸주는 아름다운 건물이다. 2001년 6월 27일 대전광역시문화재자료 제45호로 지정되었으며 '대전시 근대 기념물'로도 지정돼 있다.

목원대 김정동 교수가 펴낸 <남아있는 역사 사라지는 건축>(대원사, 2000년)에 따르면 100년 전, 대전에 처음 근대건축물이 지어지기 시작한 이래 기념할 만한 건축물은 대략 166개가량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남아있는 건물은 옛 동양척식(주)대전지점(1912년), 뾰족집(1929년), 충남도청(1932년), 대전공회장(1936년), 목동성당(1921. 현재는 거룩한말씀의수녀회 성당으로 사용하고 있음) 등 40개에 불과한 실정이니 안타까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거룩한말씀의수녀회 성당은 6·25 당시 선교사와 양민 수백 명이 학살된 아픈 기억이 서려 있는 역사적 의미가 큰 건물이다. 막상 성당을 떠나려 하니 아쉬움이 남는다. 마당 앞 바위에 걸터앉아 성당을 바라본다. 가슴 속에서 가만히 장영수의 시 '묵상'이 떠오른다.

천주교 수위 시절
밤중에 수녀관 담에서
나를 부르던 찬모 아줌마
그 뜨거운 옥수수빵 한 조각에
나는 이 세상 사랑을 배웠으니

일일이 열거해 무엇하리오
사랑의 원천은 그렇게 나를
부르는 소리 같은 것이라
여기는 나를 바보 같다고
못난이들이 히죽거릴 때에도
나는 그런 분들을
흉내내고자 하였습니다
-장영수 시 '묵상' 전문


시인은 뜨거운 옥수수빵 한 조각 먹으라고 자신을 부르던 찬모에게서 사랑을 배웠다. 배고플 적엔 빵 한 조각에도 영혼이 배부를 수 있나 보다. '구교'인 가톨릭이 이 땅에서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짐작게 한다.

천천히 언덕바지를 내려간다. "가까이 있으니 오고 싶으면 언제든 다시 오리라"라고 다짐하지만 헛된 맹세 한 가지를 덧붙이는 게 아닐까.

2007-07-24 안병기 오마이뉴스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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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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