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사진은 임정진님의 새건축사협회 답사후기 입니다. 

올해 새건축사협회 도시건축 답사는 근대 대중교통의 궤도를 따라
어떻게 주거지가 형성되었는 가를 되짚어보는 코스들로 이루어졌다.
주로 전차길을 따라다녔는데 이번엔 한 급 낮은 기동차길을 따라가게되었다.
동대문에서 끝난 전차는 기동차로 연계되었다.
그리하여 왕십리를 거쳐 뚝섬 유원지까지 이어졌다.
기동차는 전차와 달리 상부에 전깃줄이 없이
디젤기관으로 다니는 협궤열차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양대 뒷편 살곶이 다리에서 11월 17일 답사는 시작되었다.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박철수 교수가 주관이었고 경기대 안창모 교수와 내가 경동국민학교 동문으로 뚝섬의 역사를 함께 증언하기로 계획되었다.



살곶이다리는 세종때 건설하려다가 기술부족으로 기초만 세우고
중지하였던 것을 성종 14년(1483)에 완성한 것이다.
성종 때 스님들의 울력으로 만개의 돌을 날아와 건설하였다고 전해진다.
수표교 금천교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석교이고 그중 규모가 가장 크다. 난간은 없다.
길이가 258척(78미터) 너비가 20척(6미터)로 건설되었는데
지금은 강폭의 변화로 더 길어졌다.




돌기둥은 위로 약간 좁고 아래가 넓은 사각기둥 형태이고
줄무늬를 새겨넣어 물흐름을 조금이나마 원할하게 하려하였다.
교각은 네줄인데 가운데 두 줄의 길이가 약간 낮아 다리의
하중이 안쪽으로 쏠리게 되어있다.



널다란 판석을 세 줄로 나란히 덮어 대청마루처럼 만든 다리로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하여 제반교라고도 불렀다.
판석의 표면은 작은 흠집을 내어 미끄럼을 방지하였는데
커다란 비스킷처럼 보인다.

경북궁 건립시 많은 석재를 살곶이 다리에서 가져가는 바람에
20척너비의 다리가 3척만 남는 초라한 꼴로 망가져 있다가
일제 시대에 시멘트로 복구한 것을
다시 1972년 시멘트를 벗겨내고 새로이 복구하였으므로
원형의 돌은 그닥 많지 않다.



이 다리를 지나면 송파로 가서 충주로 가는 배를 탈 수도 있고
강원도 가는 길도 나온다.
단종은 이 다리를 건너 영월로 유배를 떠났다.
선조는 임진왜란때 이 다리를 건너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갔다.
시절이 좋은 때의 다른 왕들은
헌인릉와 선릉을 찾아가는 능행이나
뚝섬 일대에서 기르던 군마들과 병사들의 훈련을 지켜보거나
매를 날려 사냥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이 다리를 건너갔다.

이 일대에서 사냥이나 군사훈련을 위해 화살을 쏘는 일이 많아
화살이 꽂히는 곳이라는 뜻의 전곶교 [箭串橋] 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 한가지 전곶의 유래로는
태종의 유혈쿠데타를 못마땅하게 여긴 태조 이성계가
함흥에 머물고 있다가 함흥차사 박순의 노력으로 다시 한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마중나온 태종을 보는 순간 다시 화가 치밀어 태조가 화살을 쏘게되었다.
미리 차일기둥을 굵게 만들어서 나갔던 태종은 차일기둥 뒤에 재빨리 몸을 피해 목숨을 건지었고
그걸 본 태조가 이 또한 하늘의 뜻이로다 하면서 포기했다 한다.
그 때 화살이 꽂힌 장소가 바로 이 동네였다 하여 살곶이벌이라
불리운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은 성동교와 지하철 2호선 철교 아래에서
라이더들과 낚시꾼, 산책나온 시민들의 다리로 조용히 서 있다.

그래피티가 그려진 둑 아래 통행로를 지나
성수동 상원으로 들어섰다.




조립주택 8호.
그 집이 오랫동안 나의 주소였다.
1976년 중 2 겨울에 난 그곳을 떠나 서초동으로 이사했는데
지금도 늘 나의 어린시절 추억의 대부분은 그 집에 얽힌 것이다.
그러나 50채 정도 되는 조립주택이 모두 다가구 주택으로 재건축 되었다고 알고 있었다.
지난 번 사전답사 때 딱 한 채가 남은 걸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조만간 안창모 교수가 이 집을 실측하고 논문을 쓸 것이라 한다.
그 옛날 우리 동네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조립주택이
한국 최초의 조립식주택이라고 말했었다.
안교수가 그에 관련된 문헌을 찾아내리라 기대한다.

똑같은 집이 열채씩 5줄 정도 나란히 서 있는 동네였다.
집집마다 라일락 나무가 있어서
5월이면 온 동네가 라일락 향기에 휩싸였었다.

지금 그 시절보다 여러가지로 잘 살게 되었다고 하지만
재건축된 지금의 다가구 주택들의 덩어리들을 보면
조금도 그런 생각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
나무 한 그루 꽂을 여유공간도 없는 곳에서
왜 사람들이 살아야 하는지 누가 그 타당성을 설명할수 있는가





경동국민학교 58회 졸업생 박철수 동문과
62회 졸업생 안창모 동문이 오랜만에 모교를 방문하여 미리 사전 답사를 하던 모습이다.
교문의 방향이 바뀌었고
수영장과 UNKRA에서 지어주었던 간이교실은 사라졌고
대신 도서관과 급식실이 들어섰다.




뚝섬은 경기도 고양군에 속한 지역이었다.
군마를 기르던 곳이고 그 내력은 경마장과
현재 기마경찰대의 존재로 이어진다.
홍수에 취약했고 밭작물 재배가 흔했고
뚝섬유원지는 서울 시민들의 휴식처이기도 했다.
둑도면사무소였던 장소는 성수 천주교회로 탈바꿈되었다.
안창모 교수가 고 2때 이 성당에서 멕시코 신부님께 교리공부를 하고 세례를 받을 당시 이 느티나무는 더 컸었다고 한다.
우리 기억 속의 커다란 학교 운동장과 나무들과 개천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종종 쪼그라든다.


구종점 부근의 영화세트같은 이 가게는 70년대의 모습 그대로다.



세월의 흐름과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가옥은
이렇게 누추한 루핑천을 뒤집어 쓰고 있기도 하다.





동네마다 한두개씩 있던 대중목욕탕은
늘 사소한 사건들이 끊이지 않던 공간이었다.



안교수 집 터 앞쪽에 있던 이 집은 버스회사 사장님이 살던 매우 큰 집이었다.
그 집에 살던 친구의 유리구슬을 안교수가 많이 땄었다.



동네 분위기가 점차 낙후되면서 크고 좋은 집은
이곳에 서 있을 가치를 잃게 되어 점차 쇠락하여
은퇴하여 잊혀진 배우처럼 쓸쓸하게 서 있다.



오래 전 채소공급의 기능을 하던 뚝섬은 그 후
경공업 단지로서의 기능을 담당하면서 많은 인구를 흡수하였다.
한일약품과 영진약품, 원진레이온과 모나미 등의 큰 회사는
이미 다 이전하였고 소규모의 공장들은 곳곳에 남아있다.

서울숲의 개발로 다시금 각광받고 있는 지역이나
아직까지는 아파트가 들어선 곳 외의 대부분의 지역은
아직도 소박하고 낙후된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기동차는 사라지고 개천은 복개되었으며
뚝도극장과 성수극장은 사라졌고
경마장은 과천으로 이사했다.

경동국민학교를 졸업한 세 사람이
우연히 한 모임에서 만나
이리 오랜 세월 후에 이곳을 다시 찾아오는 일....

이것이 뚝섬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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