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달동네 난곡'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새 아파트촌이 들어섰다. 하지만 재입주율은 8.7%. '뉴타운 난곡'의 아파트촌에 들어가지 못한 1만5천 명의 그 많던 난곡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오마이뉴스>는 그들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한 채당 수억씩 하는 아파트를 얻은 대신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인지, 그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은 어떻게 복원 가능한지, 난곡의 어제와 오늘을 찾아 나섰다. /편집자주
[취재 · 글 김지원 / 기획 오연호]
“아이고, 거기 무서워서 못 가. 어디가 어딘지 알아야지.”
이분옥(65)씨는 판자촌 난곡 자리에 새로 들어선 '뉴타운 난곡'의 아파트 단지에 가 봤냐는 질문에 손을 내 젓는다.
이씨는 난곡에서 26년을 살았다. 하지만 재개발로 지어진 '뉴타운 난곡'의 아파트는 그의 차지가 아니었다. 지금은 그근처의 주택에 살고 있다.
"거기 가봤자 아는 사람도 하나도 없어, 원래 살던 사람들은 거의 다 떠났고, 순 모르는 사람들 판이지."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 불리던 난곡은 2006년 완전히 바뀌었다. 동네 외양뿐만이 아니다. 사람들도 바뀌었다. 난곡의 재개발을 맡은 주공에 따르면, 사업시행 인가 당시 난곡에 살던 주민 2529세대(약 15,000명) 중 220 세대만이 지금의 아파트에 살고 있다. 전체 가구의 8.7%에 불과하다. 원주민들이 체감하는 재정착율은 더 낮다, 5% 정도. 판잣집만 아파트로 바뀐 게 아니라 살던 사람들도 대부분 바뀐 것이다.
70년대 중반 난곡의 '국수클럽' 엄마들. <오마이뉴스>는 난곡을 떠난 그들을 찾아나섰다.
이상균(68)씨는 난곡의 이발사였다. 38년을 난곡에 살며 사람들의 머리를 깎았지만 '뉴타운 난곡'의 아파트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곳의 아파트가 아닌 바로 옆 단독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는 중풍을 앓고 있는데, 재개발을 병의 원인으로 꼽는다. 부동산 중개업자의 성화에 살던 집을 팔아 크게 손해를 봤고, 아파트 공사로 인한 소음에 속을 썩어야 했다. 새로 계획된 GRT(궤도버스) 공사로 가게가 재개발 지구에 또 다시 포함되어 이발소 또한 그만두고 말았다.
“365일 쉬는 날 없이 일했는데… 착한 게 바보지 뭐.”
살던 터전에서 쫓겨 나면서도 영악하게 셈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이상균씨의 넋두리다.
재개발의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은 이씨 만이 아니다. 재개발 당시 권리자(가옥주) 2529세대 중 17.2%인 435가구만이 실제로 난곡의 원주민이었다. 난곡은 외지인의 투기장이 되었고, 아파트에 입주할 돈이 없는 사람들 대부분은 집을 팔아버렸다. 2001년 재개발 사업인가 때 3.3㎡ 당 500만원이던 아파트 값은 현재 1400만원까지 뛰었다. 그러나 이득은 대부분 원주민 대신 외지인에게 돌아갔다.
정세리(20)씨는 판자촌 난곡이 완전히 철거되기 직전인 2002년까지 그곳에 살았다. 그 때가 12살이었고 지금은 20살 대학생이 되었다. 재개발 이후 근처 신림 3동으로 이사 해 살고 있다. 정씨는 새로 지어진 아파트에 박탈감을 느낀단다. “난곡에서의 좋은 추억을 앗아갔다”며 “쫓겨날 때의 화나던 기억이 다시 살아난다”고도 했다.
2002년 신림복지관의 조사에 따르면 정씨처럼 철거 이후에도 난곡 근처에서 살고 있는 달동네 난곡의 원주민은 72.9%나 된다. 인근인 관악, 동작, 금천구로 옮긴 9.3%까지 합치면 82.2%다. 주민의 대다수가 멀리 가지 않고 근처에 재정착한 것이다.
하지만 이웃관계는 예전만 못하다. 길에서 만나면 인사나 할 뿐, 음식을 나눠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일은 옛날 이야기가 돼 버렸다.
이순덕(66)씨는 “옛날이 그립다”고 했다. 예전 난곡에 살 때 느낀 이웃의 정이 생각나서다. 68년부터 89년까지 난곡에 산 이씨는 “이웃 덕분에 우리 막내가 살았다”고 한다. 판자촌에 살 때 집에 불이 났는데 당시 갓난 아기였던 막내를 옆집 아줌마가 구해줬기 때문이다. “큰 불이었는데도 동네 사람들이 자기 일처럼 불을 꺼 줘서 금방 불을 잡았다”며 “그 땐 정말 이웃사촌이 있었다”고 말했다.
달동네 난곡시절의 이웃사촌들(90년 즈음). 모두 난곡을 떠났다. 취재팀은 이들 중 6명을 만났다.
김혜경씨(64, 현 진보신당 고문)는 “난곡에는 정말 이웃사촌이 있었다"면서 "공동체를 통해 지역 자치를 이룬 사례”라고 했다. 김씨는 72년부터 철거 직전까지 달동네 난곡에 살았다. 김씨는 이웃사촌 문화의 대표적 예로 70년대 초에 시작된 ‘국수클럽’을 들었다. 한달에 100원씩 내서 국수를 삶아먹으면서, 서로 애도 봐 주고 생필품 공동구매나 의료사업도 함께했다. 국수클럽은 이후 보건소가 먼 주민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난곡희망의료협동조합(난협)’이라는 모임으로 확장됐다. 76년 118세대로 시작한 난협은 10년 동안 2200세대로 커졌다. 끈끈한 이웃의 정이 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든 것이다.
재개발로 판자촌 난곡이 사라지면서 그들만의 돈독한 이웃사촌 문화도 사라졌다. 아파트촌 난곡은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서울의 일반적인 아파트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달동네 난곡의 이웃사촌들이 떠나고 들어선 이곳에서 예전만큼의 이웃관계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재개발로 난곡을 떠난 사람들이 그 후,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곳은 없다. 2002년 신림복지관이 주민이주에 대한 조사를 한 것이 전부다. 대한주택공사, 동사무소 어디도 ‘난곡을 떠난 이들의 그 후’에 대해 알지 못한다. 국가는 판자촌 동네를 없애는 데만 급급했지 그곳에 살던 가난한 사람들의 '그 후'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난곡을 떠났던 윤장한(50)씨는 또 한 번 짐을 싸야 한다. 지금 살고 있는 신림 6동이 뉴타운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재개발로 옮겨 온지 8년 만이다.
2008년 서울의 여기저기에서는 뉴타운의 삽질이 계속되고 있다. 뉴타운은 그 이름만 바뀌었을 뿐 난곡 재개발이 빚어낸 '상처'를 반복하고 있다. 원주민의 재정착율이 17% 정도로 낮게 예상되고, 살던 곳과 생계를 잃은 주민들에 대한 대책도 미미하다. 이웃사촌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달동네 난곡은 사라졌다. '뉴타운 난곡'의 아파트촌에 들어가지 못한 1만5천 명의 그 많던 난곡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오마이뉴스>는 그들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한 채당 수억씩 하는 아파트를 얻은 대신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인지, 그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은 어떻게 복원 가능한지, 난곡의 어제와 오늘을 찾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