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운상가에 대한 국민일보 3월 16일 기사를 알려드립니다.
http://www.kukinews.com/news2/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921224607&code=13110000

090316_18_1.jpg

역사와 자생의 바다에 좌초된 개발독재 상징

서울은 원래 동서로 긴 축을 형성하며 발전하여 왔다. 우리가 잘 아는 종로가 광화문에서 동대문으로 뻗어 있으며, 청계천이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흐르고, 을지로·퇴계로 모두 동서로 뻗은 것을 보면 그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서울의 축에 남북으로 1.2㎞에 걸쳐 그것도 세계문화유산 종묘에서, 경관의 중심인 남산까지 뻗은 거대한 구조물이 하나 있다. 바로 '세운상가'이다.

세운상가는 실제로는 종로와 청계천 사이에 놓인 상가의 이름으로, 정확하게는 세운상가와 세운상가 가동으로 나뉘고, 청계천 넘어 남쪽으로 세운청계상가와 대림상가, 그리고 을지로를 넘어 삼풍상가와 풍전호텔, 마른내길을 건너 신성상가 그리고 맨 끝에 충무로 대한극장 맞은편 진양상가로 되어있다. 세운상가를 자세히 다룬 손정목 교수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 따르면, 그 규모는 8개 건물군에 대지는 모두 1만 6278.4㎡(약 4933평), 건물 연면적은 20만5536.24㎡(약6만2284평) 그리고 건물군 안에는 2000개가 넘는 점포와 사무실, 호텔객실 177개, 주택 851개가 혼재하고 있다고 한다.

목조도시 '경성'에 그어진 소개공지대

그렇다면 이렇게 길고 커다란 도시구조물이 어떻게 서울의 역사도심 한가운데 들어서게 된 것일까? 그 시작은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던 194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월10일 도쿄에 가해진 미공군 B-29의 폭격은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며 극심한 피해를 가져온다. 이에 일본은 공습에 의한 화재로 불이 번지지 못하게 도시공간을 '소개-疏開'하는 도시소개대강을 내리고, 식민도시 경성에 19군데의 소개공지와 소개공지대를 고시한다.

세운상가의 지금 '자리'는 소개공지대로 지정된 후, 대대적인 동원과 철거의 결과 만들어졌다. 수백 년을 걸쳐 지형과 지세에 맞게 차곡차곡 형성되어 왔던 서울의 필지들 그리고 집과 골목들이 하루아침에 허무한 공터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산들과 성곽에 둘러싸여 초가와 기와지붕이 장관을 이루던 서울이라는 '목조도시'에 멸망해 가던 일제는 큰 상처를 남기며 물러선 것이다.

무허가 판자촌 지대가 서울의 명소로

비어진 땅에는 한국전쟁이 끝나 몰려든 이재민과 월남민으로 채워지고, 무허가 판잣집이 장관을 이루게 된다.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서울에 폭 50m에 길이 1㎞에 이르는 '거대한 바라크 지대'가 형성되었으며, 60년대 중반까지 사창이 창궐하는 '종삼'의 남쪽지역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일제가 낸 상처는 이제 누구도 어쩔 수 없는 도시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세운상가가 그 모습을 도시에 나타내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등장이 필요했다. 하나는 66년 취임하자마자, 수많은 교량과 도로를 건설하고, 한강개발과 여의도 건설, 시민아파트를 지은 불도저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서울시장 '김현옥'이고, 다른 하나는 30대에 국회의사당 현상설계에 당선되며 우리 근현대건축에 중심인물로 떠오른 젊은 건축가 '김수근'이다. 김현옥 시장과 만난 자리에서, 김수근은 보행자 몰과 보행자 데크, 입체도시 등 그가 배우고 꿈꾸는 개념을 펼쳐냈다. 그리고 그 말은 바로 프로젝트가 되어 실현되기에 이른다. 건축가의 공상과 정치가의 야망은 화학반응을 일으키기 쉬었던 것이다. 믿기지 않는 것은 설계가 66년에 시작되었는데, 이미 김현옥 시장은 67년 11월에 대통령과 함께 준공식에 참석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블록의 건물들도 1968년에 속속 준공되기에 이른다.

세운상가는 들어서고 바로 서울의 명물이 된다. 황량한 60년대의 땅 위에 도시의 남북을 가로지르며 거대한 배처럼 떠 있던 8층에서 17층짜리 주상복합의 콘크리트 구조물은 새롭고도 강렬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 안의 최고급 아파트와 호텔, 가게를 찾아들었으며 관광의 명소가 되었다.

도시라는 바다에 좌초한 근대건축물

하지만 그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고급아파트는 70년대 강남이 개발되면서 그 자리를 내어주고, 상가는 백화점이 활성화되고, 전자 상가 등이 용산에 자리 잡으면서 중심상권의 힘을 상실해 갔다. 도시는 세운상가를 지었던 당시의 생각보다 더욱 거대한 것이었고 파워풀한 것이었다. 하나의 건물에 만족하지 않았으며 더욱 큰 지역, 더 큰 볼륨을 찾아 쉼 없이 확장하고 뻗어갔다.

슬럼지역을 해소하고 개발하기 위해 다급하게 들어선 세운상가는 결국,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좌초하고 말았다. 3층 높이의 보행자 데크는, '학생 좋은 것 하나 있는데'로 연상되는 음란물을 파는 일탈의 공간 또는 주차장으로 변하였으며, 상가 주변에 연계하여 자리 잡은 극장들도 철거되거나 종교시설이 되었다. 또한 고급 주거용 아파트들도, 허름한 사무실이 되거나 게임기나 노래방기계를 수리하고 쌓아두는 창고가 되었다.

살아있는 도시 또 다른 개발의 아쉬움

하지만 그렇다고 세운상가는 좌초하여 슬럼화 되었을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답사를 통해 본 세운상가와 주변 8개 블록은 여전히 우리 서울의 고유한 옛길과 땅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복개되었으나 청계천을 향해가는 천길이 있었으며, 주거에서 공장들로 대체된 동네의 풍경이 남아있었다. 또한 좁은 골목길과 복도가 실핏줄처럼 얽혀, 하나의 생명처럼 살아가는 부품가게와 작업공장 그리고 이름 없는 식당들도 보아왔다. 또한 세운상가의 일부 구역은 리노베이션을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도시가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고 제 모습을 찾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이러한 가운데 세운상가는 현재 공사막에 둘려 일부를 철거 중이다. 종묘를 가로막던 아파트가 사라지니, 누가 보아도 시원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것은 다시 45년, 66년의 어리석은 행위를 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앞선다. 세운상가를 없애고 공원을 만들어 중심에 놓는 커다란 계획이지만, 동시에 이것은 세운상가보다 몇 배 큰 '도시의 기억 상실과 정체성 훼손'을 가져올 재개발이 될 가능성이 커 보이기 때문이다.

글 조정구

1966년 서울생. 서울대 건축학과와 같은 대학원 졸업. 일본 도쿄대 박사과정. 현재 guga 도시건축 대표. '우리 삶과 가까운 보편적인 건축'에 주제를 두고, 지속적인 도시답사와 설계 작업을 하고 있다. 2004년 새건축사협회 신인건축상 수상, 한옥 호텔 라궁으로 2007년 대한민국 목조건축대전 대상, 2008년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 등 다수.

그림 이매리

1963년생. 조선대 미술학 석·박사, 현 조선대·목포대 강사. 서울 베이징 뉴욕 등서 개인전 14회, 단체·초대전 100여회. 한국미술협회 서양분과 이사.

분류 :
Project News
옵션 :
:
:
:
:
List of Articles
제목 이름
Project News 091106금. 제6회 정동도시건축세미나 공지 imagefile gugaua
Project News 중앙일보 '3040 한국 건축의 힘' 조정구(구가도시건축) image gugaua
Project News 090918금. 제5회 정동도시건축세미나 공지 imagefile gugaua
Project News architecture ASIA 기사소개 imagefile gugaua
Project News 가회동a한옥 신축공사 상량식 imagefile gugaua
Project News 090807금. 제4회 정동도시건축세미나 공지 imagefile gugaua
Project News 장수마을(삼선4구역) 대안개발계획 최근소식 image gugaua
Project News 제3회 정동도시건축세미나 공지 imagefile gugaua
Project News 제2회 정동 도시건축 세미나 imagefile gugaua
Project News 정동 도시건축 세미나 imagefile gugaua
Project News 국민일보 南村, 근대의 엘레지 ⑨ 잇다, 세운상가 image gugaua
Project News 신한옥 디자인 공모전 우수상 수상 gugaua
Project News 드라마 꽃보다 남자 윤지후의 한옥집 '라궁' image gugaua